28 백순조(白順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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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1985년 4월 1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월성군 내남면
효부(孝婦) 백순조(白順祚) 56세

17세(歲)의 어린 나이로 시집을 온 백순조(白順祚) 여사(女史)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남편(男便) 혼자뿐만이 아니라, 연로(年老)한 시조부모(媤祖父母)님과 시부모(媤父母)님, 그리고 시(媤)동생 등 많은 식구(食口)들이라는 실정(實情)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신혼(新婚)의 기쁨도 맛볼 사이 없이 다음 날부터 웃어른 봉양(奉養)과 시(媤)동생들을 키우는 일에 전념(專念)해야만 하였다. 

그런데 운명(運命)의 장난은 너무나 가혹(苛酷)하다고나 할까, 시집온 지 3년(年)만에 남편(男便)과 사별(死別)하는 비운(悲運)을 맞게 됐으니 세상(世上)에 이런 기막힌 일이 또 어디 있으랴? 20세(歲)의 꽃다운 나이에 청상(靑孀)이 돼버린 그를 보고 인근주민(隣近住民)이나 친척(親戚)들은 한결같이 개가(改嫁)하라는 권유(勸誘)와 충고(忠告)가 빗발쳤지만 그의 결심(決心)은 이미 굳어져 있었다. 

'뱃속에 남편(男便)의 씨앗이 들어있다. 그리고 또한 불쌍한 노시조(老媤祖) 부모(父母)님과 시부모(媤父母)님을 외면(外面)하고 나만의 행복(幸福)을 찾아서 어떻게 떠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인간(人間)의 도리(道理)가 아니다.' 백여사(白女史)의 각오(覺悟)는 대단했다. 

우선 죽은 남편(男便)을 대신(代身)하여 생계(生計)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품삯 일을 하며 새끼꼬기, 가마니짜기 등 무엇이든지 손에 닥치는 대로 열심히 일을 했다. 

유복자(遺腹子)인 아들을 낳은 후(後)에도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苦難)이 엎치고 덮쳤지만, 그는 이런 모든 역경(逆境)을 인내(忍耐)와 노력(努力)으로 싸워 이겨 나갔다. 

그런데 불행(不幸)의 꼬리는 한(限)없이 길다고나 할까, 그 후(後) 시조부(媤祖父)님과 시부(媤父)님이 차례로 별세(別世)하시고 말았다. 

백여사(白女史)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기만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눈물로 세월(歲月)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시 새로이 마음을 가다듬은 백여사(白女史)는 더욱 열심(熱心)히 일하면서 허덕이는 가계(家計)를 힘겹게 이어 나갔다. 

그의 보람은 헛되지 않아, 훗날 시(媤)동생과 유복자(遺腹子)인 아들을 각각(各各) 대학(大學)을 거쳐 지금은 사회(社會)의 훌륭한 일꾼으로서 활약(活躍)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쁨 속에 이번에는 시모(媤母)님이 중풍(中風)으로 마음대로 눕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며 걷지도 못하는 앉은뱅이가 된 채 병석(病席)의 몸이 되고 말았다. 그 날부터 지금껏 7년(年)째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는 고역(雇役)스러운 일에서부터, 목욕(沐浴)을 시키는 일에 이르기까지 그의 극진(極盡)한 정성(精誠)이 뒤따랐다. 

환자(患者)의 방(房)을 어떻게나 깨끗하게 유지(維持)했던지 인근주민(隣近住民)들이 놀러와서 환자(患者)의 방이 마치 새댁이 기거(起居)하는 방만 같다고 칭찬(稱讚)이 대단했다. 

17세(歲)에 시집와서 20세(歲)때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되어 지금껏 근(近) 40년(年) 동안을 오로지 시댁(媤宅)을 위해 몸바쳐 온 백여사(白女史)야말로 근래(近來)에 보기 드문 풍형적(豊型的)인 한국(韓國)의 열부(烈夫)요, 효부상(孝婦像)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유복자(遺腹子)인 아들에게 '인내(忍耐)'라는 두 글자를 가훈(家訓)으로 이어 주고 싶다는 그는, 오늘도 입가에 미소(微笑)를 띠우면서 환자(患者)의 방(房)을 드나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