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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금이(南金伊) 여사(女史)는 그의 나이 불과(不過) 15세(歲) 때 결혼(結婚)을 하여, 슬하(膝下)에 6남매(男妹)를 두고 시부(媤父)님과 남편(男便)을 모시고 살아온 여인(女人)으로서 그의 나이 80세(歲)에 이른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한 평생(平生)은 역경(逆境)과 고난(苦難)으로 점철(點綴)된 한 편(篇)의 비극(悲劇)이었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닐 만큼 쓰라린 역정(歷程)이었다.
그가 결혼(結婚)하여 시댁(媤宅)에 와 보니, 그곳에는 맹인(盲人)인 시부(媤父)님과 병약(病弱)한 남편(男便) 그리고 어린 시(媤)동생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다음 날부터 남여사(南女史)는 병약(病弱)한 남편(男便)과 더불어 공동가장(共同家長) 구실을 하지 않으면 안될 딱할 입장(立場)임을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남여사(南女史)는 남의 농토(農土)를 소작(小作)하면서 품팔이를 하기도 했고, 그것도 부족(不足)해서 밤에는 베틀에 매달려서 일해야만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맹인(盲人)인 시부(媤父)님이 외출(外出)을 했다가 귀가(貴家)하는 길에 실족(失足)을 하여 병상(病床)에 눕게 됐는데, 그 날부터 식사(食事) 시중에서부터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는 일에 이르기까지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처리(處理)하면서 10년(年)을 하루같이 정성(精誠)들여 봉양(奉養)했다.
그런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평소 병약(病弱)했던 남편(男便)마저 원인(原因) 모를 병(病)으로 시부(媤父)님 곁에 나란히 눕게 됨으로써 남여사(南女史)의 손길은 더욱 바빠졌다.
벌써 이 즈음만 해도 슬하(膝下)에 5남매(男妹)를 두었고, 또한 만삭(滿朔)의 무거운 몸이어서 그 자신(自身)의 몸도 가눌 길이 없었지만, 매일같이 험준(險峻)한 산(山)길을 헤매면서 시부(媤父)님과 남편(男便)에 좋다는 약초(藥草)캐기 작업(作業)에 전력(全力)하는 등 그의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은 정말 놀랍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만삭(滿朔)의 몸으로 약초(藥草)를 캐다가 길을 잃고 밤을 꼬박 새우면서 산중(山中)을 방황(彷徨)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피로(疲勞)에 지쳐 쓰러져 산(山)에서 막내아들을 해산(解産)한 일도 있었다.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나 할까, 마침 그 때 나무를 채취(採取)하기 위해 산(山)에 올라왔던 동민(洞民)들이 그 광경(光景)을 목격(目擊)하지 못했던들 남여사(南女史)는 살아날 수 없었으리라고 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事實)은 아기를 분만(分娩)한 후(後) 1주일(週日)을 막 넘기기가 바쁘게 또다시 산중(山中)을 헤매면서 약초(藥草)캐기 작업(作業)을 계속하였다는 사실(事實)이다.
그것은 본 인근주민(隣近住民)들은 한결같이 "세상(世上)에 저렇게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하면서 지금도 그의 효행(孝行)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稱讚)하고 있다.
끝내 며느리와 아내의 따뜻한 간병(看病)과 봉양(奉養)의 정성(精誠)도 외면(外面)한 채 시부(媤父)님과 남편(男便)은 약속(約束)이나 한 듯 차례로 타계(他界)하고 말았다.
그 후(後) 남여사(南女史)는, 슬기롭게 모진 세파(世波)와 싸워가면서 슬하(膝下)의 6남매(男妹)를 모두 훌륭하게 키워 결혼(結婚)시켰고, 지금은 아들, 며느리, 손자(孫子)들과 함께 그가 겪은 옛날 이야기를 전설(傳說)처럼 되뇌이면서 그런 대로 행복(幸福)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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