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신향숙(申香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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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1985년 4월 1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양군 석보면
효부(孝婦) 신향숙(申香淑) 29세

신향숙(申香淑) 여사(女史)는 평소 성품(性品)이 온순(溫順)하고 몸가짐이 단정(端正)하며, 시조모(媤祖母)님과 시모(媤母)님 봉양(奉養)이 지극(至極)하고 또한 남편(男便) 공경(恭敬)함이 정성(精誠)스럽기만 하여, 언제나 마을에서 칭송(稱頌)의 대상(對象)이 되어 왔다. 

21세(歲)때 결혼(結婚)한 그는, 신혼초(新婚初)부터 중풍(中風)으로 기동(起動)을 못하는 시조모(媤祖母)님께 매일(每日) 문안인사(問安人事)를 드리고, 장날이면 좋아하는 어육(魚肉)을 사서 대접(待接)하는 등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기만 하였다. 

"나이도 어린 새댁이 손수 할머니의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고, 더럽혀진 의복(衣服)을 깨끗이 세탁(洗濯)해서 갈아입혀 드리는 등 놀라운 정성(精誠)에 얼마나 감탄(感歎)했는지, 나 자신(自身)이 얼마나 부끄러워했는지 모른다." 이와 같은 어느 인근주민(隣近住民)의 고백(告白) 그대로, 그의 지극한 효성(孝誠)은 신혼초(新婚初)부터 3년(年)동안 계속(繼續)되었다.

끝내 손부(孫婦)의 극진한 간호(看護)의 보람도 없이 그의 시조모(媤祖母)님이 별세(別世)하던 날, 시조모(媤祖母)님이 신여사(申女史)의 손을 꼭 쥐고 마지막 미소(微笑)를 그에게 안겨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이번엔 평소(平素) 술을 즐겨 마시던 3대(代) 독자(獨子)인 남편(男便)이 간경화증(肝硬化症)으로 병석(病席)에 눕게 됐다. 

신여사(申女史)는 그 날부터 명의(名醫)와 명약(名藥)을 샅샅이 찾으면서 구환(救患)에 전력(全力)을 다했지만 병세(病勢)는 더욱 악화(惡化)되고 백약(百藥)이 무효(無效)했다. 

그러나 신여사(申女史)는 조금도 실망(失望)하거나 낙담(落膽)하지 않고, 날품팔이를 하면서도 태산준령(泰山峻嶺)을 누비며 약초(藥草)를 캐서 팔아 모은 돈으로 좋다는 약(藥)은 모두 써보았으나, 모든 것은 허사(虛事)로 끝나고 27세(歲)의 젊은 나이로 남편(男便)은 타계(他界)하고 말았다. 

결혼생활(結婚生活) 4년(年)만에 자식(子息) 하나만을 유산(遺産)으로 남기고 떠난 남편(男便)이 한(限)없이 원망(怨望)스러워, 몇 번이나 죽어 버리려고 마음먹기도 했으나, 칠순(七旬)의 시모(媤母)님과 네 살짜리 철부지 아들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렇다. 죽은 만한 용기(勇氣)가 있다면 그 용기(勇氣)를 되살려서 굳세게 살아보자.' 신여사(申女史)는 이와 같이 마음을 굳게 가다듬고 가장(家長)으로서의 의무(義務)를 손색없이 다해 나갔다. 

25세(歲)에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된 그의 딱한 처지(處地)에 동정(同情)의 눈길도 많았다. 

"눈 딱 감고 재혼(再婚)해요. 아, 그 나이에 아까운 인생(人生)을 썩힐 게 뭐유? 하루 이틀에 끝나는 인생(人生)도 아니잖아요, 재혼(再婚)하도록 해요." 

이와 같은 유혹(誘惑)의 손길이 그의 두 어깨를 누르기도 했지만, 어린 자식(子息)의 장래(將來)보다도 무의무탁(無依無托)한 노시모(老媤母)님을 누가 봉양(奉養)할 것인가 하는 지극(至極)한 효심(孝心)이, 모든 유혹(誘惑)을 보기 좋게 물리치곤 하였다. 

"내 한 몸을 희생(犧牲)시켜서 시모(媤母)님과 아들 녀석의 행복(幸福)을 얻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보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라고 신여사(申女史)의 진심(眞心)은 이토록 곱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