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이정수(李貞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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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1985년 4월 1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청송군 부남면
효부(孝婦) 이정수(李貞壽) 39세

이정수(李貞壽) 여사(女史)는 시부(媤父)님과 남편(男便) 그리고 세 자녀(子女)를 거느린 맏며느리로서 그런 대로 농사(農事)일을 하면서 행복(幸福)한 나날을 꾸려왔다. 

그러던 중 만성신경통(慢性神經痛)으로 고생해 오던 시부(媤父)님이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중풍(中風)까지 겹쳐 문(門)밖 출입(出入)도 못하는 병석(病席)의 몸이 되고 말았다.

그 날부터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시부(媤父)님을 돌보아 온 그는, 하루에도 여러 차례에 걸친 대소변(大小便) 받아내기와 조석(朝夕)으로 밥을 떠먹여 드리는 일 등, 간병(看病)에 전심전력(全心全力)을 하는 한편, 약(藥)을 구(求)하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할 정도(程度)로 밤마다 60여리(餘里)가 넘는 면소재지(面所在地)까지 왕래(往來)하면서 구환(救患)에 힘써 왔다. 

아무리 좋은 약(藥)을 써도 차도(差度)가 없었지만, 그는 조금도 실망(失望)하거나 좌절(挫折)하지 않고 꾸준히 양약(良藥)을 구(求)하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했다. 

이로 인(因)하여 가계(家計)는 더욱 궁핍(窮乏)해져 갔고, 농사(農事)일에도 신경(神經)을 많이 쓰지 못한 탓으로 해마다 풍년(豊年) 속의 흉년(凶年)을 맞아야만 할 만큼, 이여사(李女史)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은 오직 시부(媤父)님이 하루 속(速)히 완쾌(完快)되기를 비는 마음 그것뿐이었다. 

"이여사(李女史)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은 정말 놀랍습니다. 밤낮 꼬박 지켜 앉아 간병(看病)할 때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는 그의 인자(仁慈)한 마음씨는 부처라 해도 과언(過言)은 아닙니다."라는 그를 지켜본 인근주민(隣近住民)의 말대로 이여사(李女史)의 너그러운 인간성(人間性)은 자애(慈愛)로움 그것이었다. 

인근주민(隣近住民)들이 그를 가리켜 효부(孝婦)라고 말할 때마다 이여사(李女史)는 "그런 말은 안 했으면 좋겠다. 자식(子息)된 도리(道理)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인데 효부(孝婦)라니? 그런 말을 들으면 오히려 내가 부끄러워 쥐구멍에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心情)이다. 제발 효부(孝婦)라는 말은 하지 말아 달라."라고 하면서 자신(自身)의 미덕(美德)을 밖으로 나타내지 않으려는 그의 겸손(謙遜)한 마음씨에 동민(洞民)들은 더욱 탄복(歎服)하면서 박수(拍手)를 보내고 있다. 

이여사(李女史)는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곧잘 했다. 

"효도(孝道)는 하루아침에 시작해서 하루아침에 끝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父母)에 대(對)한 효도(孝道)를 생활화(生活化)하여 죽는 날까지 한 시(時)도 잊지 않고 계속(繼續)돼야 하는 것이 바로 효도(孝道)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모(父母)의 은혜(恩惠)가 끝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효도(孝道) 또한 끝이 없는 것이다." 

이여사(李女史)의 이와 같은 확고(確固)한 효도관(孝道觀)이 집집마다 마을마다 메아릴 칠 때 명랑사회(明朗社會)도 이룩되는 것이 아닐까. 

이여사(李女史)는 오늘도 시부(媤父)님의 대소변(大小便)을 손수 받아내면서 가볍게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는데, 그 노래 가사(歌詞)는 이러했으리랴 짐작된다. 

"나뭇가지 고요하려 해도 바람이 아니 그쳐 주고 자식(子息)이 봉양(奉養)하려 해도 어버이 아니 기다려주시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