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김옥순(金玉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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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1985년 4월 1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의성군 안계면
효부(孝婦) 김옥순(金玉順) 46세

술 때문에 남편(男便)과 사별(死別)해야만 했던 김옥순(金玉順) 여사(女史)는, 술이 얼마나 원망(怨望)스러웠던지 이렇게 울분(鬱憤)을 토(吐)하고 있었다. 

"양조장(釀造場) 앞을 지나갈 때마다 피를 토(吐)할 것만 같은 울분(鬱憤)을 느낍니다. 왜냐구요? 술이라는 요물(妖物)이 없었던들 저리 남편(男便)은 죽지 않았을 겁니다. 그 놈의 원수(怨讐)같은 술이 저의 남편(男便)의 목숨을 앗아갔어요." 

술로 말미암아 발병(發病) 5년(年)만에 젊은 아내와 한 살짜리, 다섯 살짜리 두 자식(子息)을 남겨 놓고 숨져간 그의 남편(男便)은, 충격(衝擊)으로 병(病)든 시모(媤母)님과 가난을 그에게 물려준 채 타계(他界)하고 말았다. 

가산(家産)이라야 600여평(餘坪)의 전답(田畓)이 전부(全部)일 뿐, 해마다 겪는 적자(赤字) 가계(家計)는 품삯일과 새끼꼬기 등으로 근근 이어 나갔다. 

아들의 죽음에 충격(衝擊)을 받은 탓일까, 그의 남편(男便)이 별세(別世)하던 바로 그 해에 시모(媤母)님마저 뜻하지 않게 실명(失明)이 되는 비극(悲劇)을 맞게 되었다. 너무나 가혹(苛酷)한 운명(運命)앞에 시모(媤母)님과 김여사(金女史)는 서로 부등켜안고 울어 보았지만 현실(現實)은 냉혹(冷酷)하기만 하였다. 

그 때 김여사(金女史)는 시모(媤母)님의 손을 잡고 "어머님, 제가 손이 되고 발이 되어 드릴 테니 너무 실망(失望)하지 마세요."라고 위로(慰勞)하였다. 

김여사(金女史)는 이와 같이 위로(慰勞)한 후(後) 그날부터 좋은 약(藥)을 구(求)하기 위해 백방(百方)으로 탐방(探訪)했고, 병원(病院)과 의원(醫院)을 드나들면서 시모(媤母)님의 시력(視力)을 회복(恢復)시켜 보려고 노력(努力)해 보았지만 모든 것은 허사(虛事)로 끝나고 말았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15년(年) 동안의 긴 세월(歲月)을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으로 봉양(奉養)해 온 김여사(金女史)는, 시모(媤母)님을 돌보는 일이 마냥 즐겁기만 한 듯 언제나 입가에는 미소(微笑)를 머금으면서 보살펴 왔다. 

외출(外出)할 때는 김여사(金女史)가 지팡이 구실을 하면서 시모(媤母)님을 인도(引導)했으며, 하루에 몇 번씩 드나드는 변소(便所)도 그의 효성(孝誠)스런 손길이 뒤따랐다. 

그리고 논밭에서 일을 하다가도 행여나 하여 몇 번씩 이나 집에 가서 보살펴 드리는 등, 그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은 삼척동자(三尺童子)라도 감복(感服)할 정도였다. 

"김여사(金女史)의 효성(孝誠)이 어찌나 지극(至極)한지 동민(洞民) 모두가 찬사(讚辭)를 보내고 있다. 김여사(金女史)는 그의 시모(媤母)를 위해 손발이 되고 지팡이가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자(文字) 그대로 분신(分身)이 되고 있다."라는 동민(洞民)의 찬사(讚辭)대로 김여사(金女史)는 시모(媤母)님의 분신(分身)이었다. 

밤에 잠을 잘 때도 시모(媤母)님과 더불어 한 자리에 누워서 잠자는 김여사(金女史)는, 지금껏 15년간(年間)을 한결같이 단 한마디의 불평(不平)이나 불만(不滿)을 표면(表面)에 나타내는 일 없이 며느리의 사명(使命)을 충실(忠實)히 수행(遂行)해 왔다. 

시모(媤母)님의 무료(無聊)함을 덜어 드리기 위하여, 고담(古談)이나 전설(傳說) 등의 이야기를 구수하게 읽어 드리기도 하는 그는, 기력(氣力)이 왕성(旺盛)한 73세(歲)의 시모(媤母)님 얼굴을 바라다보면서 이런 농담(弄談)을 했다. 

"어무이예, 미쓰 코리아에 한 번 나가 보이소, 오늘따라 와 이리 미인(美人)이 됐능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