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최옥남(崔玉南)

페이지 정보

본문

제28회(1985년 4월 1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영천시 성내동
효부(孝婦) 최옥남(崔玉南) 49세

최옥남(崔玉南) 여사(女史)는 시모(媤母)님과 남편(男便), 그리고 슬하(膝下)의 7남매(男妹) 등 열 식구(食口)가 영세(零細) 고물상(古物商)에다 생계(生計)를 걸고 살아가고 있는 가난한 가정(家庭)을 주부(主婦)이다. 

84세(歲)인 그의 시모(媤母)님은 18년전(年前)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노환(老患)으로 병석(病席)에 줄곧 누워서 생활(生活)해 왔는데, 그 동안 최여사(崔女史)가 겪어 온 간병(看病)의 발자취를 한 마디로 표현(表現)해서 눈물의 발자취 바로 그것이었다 한다. 

영세(零細) 고물상(古物商)을 경영(經營)하고 있는 남편(男便)을 여자(女子)의 몸으로 힘겹게 도우면서 시모(媤母)님의 뒷바라지를 해 온 그는, 이틀이 멀다 하고 깨끗이 목욕(沐浴)을 시켜 드렸고, 식사(食事)도 한 술 두 술씩 정성(精誠)들여 떠먹여 드리는 한편, 의복(衣服)도 항상 깨끗이 세탁(洗濯)을 해서 갈아 입히곤 하였다. 

그러던 중 1981년(年) 추석(秋夕) 전일(前日), 시모(媤母)님께서 무리(無理)하게 몸을 이끌고 대문(大門)을 나서다가 실족(失足)을 한 것이 원인(原因)이 되어 그 날부터 기동(起動)도 못하고 눕게 됐다. 

이 때부터 매일(每日)같이 하루에도 몇 차례에 걸쳐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면서 시모(媤母)님을 극진히 간병(看病)해 온 최여사(崔女史)는 식구(食口)들의 뒷바라지는 뒤로 제쳐놓고 구환(救患)에만 전심전력(全心全力)하였다. 

그러나 병세(病勢)는 더욱더 악화(惡化)되니 친지(親知)들은 장례준비(葬禮準備)를 서두르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단호(斷乎)하게 항의(抗議)하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돌아가시지 않아요. 제가 시모(媤母)님을 살려놓고 말 테니 두고 봐요." 

최여사(崔女史)는 다른 친지(親知)들의 절망(絶望)과는 달리 조금도 좌절(挫折)하지 않고 더욱 정성(精誠)들여 간호(看護)하였다. 

병(病)에 좋다는 약초(藥草)를 캐기 위해 깊은 산(山)을 헤매다가 무릎이 깨지고, 손바닥이 터져서 피를 흘린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최여사(崔女史)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은 오로지 시모(媤母)님의 건강회복(健康回復)뿐이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 했듯이, 그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과 정성(精誠)어린 간호(看護)로 마침내 그의 시모(媤母)님은 자리에서 일어나게 됐고, 바깥 출입(出入)도 할 수 있을 만큼 잃었던 건강(健 康)도 다시 찾게 되었다. 

그 어머니에 그 자식(子息)들이라고나 할까. 최여사(崔女史)가 잠시 집을 비울 때는 자식(子息)들이 서로가 다투어 할머니를 하늘처럼 받들며 보살펴 드리는 바람에, 마을에서는 이들의 효행(孝行)을 가리켜 '孝(효)의 낙원(樂園)'이라고까지 칭찬(稱讚)하기도 했다. 

"어떤 날은 손자(孫子)들이 번걸아가면서 할머니를 등에 업고 동내(洞內)를 한 바퀴 돌 때도 있는데,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 광경(光景)을 볼 때마다 살아 생전(生前)에 부모(傅母)님께 효(孝)를 못다한 것이 후회(後悔)스럽기만 하다."라는 어느 동민(洞民)의 말 그대로, 이들의 효성(孝誠)은 멀리 이웃 마을에까지 알려져 최여사(崔女史)네의 사랑방은 마치 경로당(敬老堂)처럼 언제나 놀러 온 노인(老人)들로 대만원(大滿員)을 이루고 있다. 

최여사(崔女史)는 오늘도 자녀(子女)들을 한 자리에 불러놓고 이렇게 타이르고 있었다. 

"효(孝)는 인간(人間)이 인간(人間)답게 살아가고자 할 때 가장 먼저 실천(實踐)해야 하는 근본(根本)이니라."라고